3.1 독립만세후 1923년, 예천군 개포면 금리에서 설립 되었다가 일제의 모진 탄압을 받아서 1926년에 폐교된 계동학원의 항일민족교육을 기리고자 2012년에 창설된 계동학원유허비건립위원회(위원장 정희융)는 지난 4일오전 11시 예천군 개포면 금리 계동학원 옛터에 유허비를 세우고 기관단체장, 김진우 전 헌법재판관, 유성종 전 국립교육평가원장, 반형식 전 국회의원 등 300 여명 참석해 기념식을 개최했다.
계동학원은 일제치하 개포면 최초의 학교였으며 보통학교 6년과정을 4년간 가르치는 초등학교 수준의 민족학교였는데 설립자는 협성학교 박창호(25세) 학생이었다.
모두 4인의 선생은 헐벗고 굶주린 인근의 무산(無産)학생 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준 계동학원은 2년 만에 80여명의 학생이 공부하는 전국적으로 모범임을 자랑하는 민족학교로 발전했다.
계동학원 선생님들은 학생을 가르치며 은연중에 항일의식을 고취하고 있었는데 1926년 6.10만세사건이 일어나자 일제는 교사의 사상이 불온하다하여 그해 10월 6일 학교를 폐쇄하고 말았다.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한 설립자 박창호 학감은 그달 10월 9일 눈물의 폐쇄식을 거행했다.
박 학감은 단상에 올라서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어린 학생들에게 어떠한 경우에도 계속해서 공부할 것을 당부하고 눈물로 작별했다.
이후 박창호 선생은 동아일보 기자로 이 땅의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었으며 신간회예천지회 간부 등으로 일제의 탄압에 온 몸으로 맞섰다.
위원회에서는 2013년 1월 18일 계동학원의 항일 민족교육을 주제로 학술연구발표회를 개최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이 고장출신인 철학박사 김녕 김봉균 교수가 비문을 짓고 제자 글씨도 이 고장 출신의 문학박사 황재국 교수가 썼다.
그리고 유허비 형상은 전 성신여대 미대 김상진 교수가 디자인 했다.
한편, 1927년 10월 15일 계동학원 폐쇄식 장면을 생생하게 보도 한 익명의 기자가 예천읍 출신 고 김상기(1902-1961)기자임을 밝혀내고 후손인 조카 김두인씨에게 송공패를 대신 봉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