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국민이 너나 할 것 없이 힘든 시기이다. 닥친 고난과 시련이 크면 클수록 우리는 놀라운 저력을 발휘했다. 지금 온갖 어려움을 겪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낙관과 긍정의 자세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면 내일엔 또 내일의 태양이 반드시 떠오를 것이다. 이 시간에도 실의에 빠져있는 많은 예천인들에게 “희망의 전도사”역할을 하고 있는 김학동(보문면 오암리 출신 일산푸른학원 경영) 이사장의 성공신화 인생이야기를 지난 3일 인터뷰 했다.
-100미터 달리기하듯 달려 왔다.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면 꿈만 같다. 기나긴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온 듯하고, 외줄타기 곡예를 이제 막 마치고 내려온 듯 하기도하다. 미친 듯이 일에만 빠져 살았다. 주말이면 가족들과 함께 거실에 앉아 TV연속극을 즐기는 이웃의 모습이 너무나도 부러웠고, 친구모임, 경조사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삶이 답답하여 때로는 이런 생활을 멈추고 싶은 때도 있었다. 그러나 사업이란 자전거타기와 같아서 멈추는 순간 쓰러지고 만다. 그래서 마라톤 풀코스를 100미터 달리기하듯 달려 왔다.
- 아픈 만큼 단련된다.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부터 고교 입학 때까지 한 번도 최 상위권을 벗어난 적이 없었는데 고교생활을 하면서 어려운 가정 형편을 비관하고 방황생활을 했다. 공부를 좀 한다는 친구들은 대부분 대구나 안동으로 유학을 가고, 성적은 우수했지만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고향에 남아 있어야 했던 처지를 못 견뎌했던 것 같다.
그 결과 대입 학력고사 성적은 수준 이하였고, 단국대학에 입학원서를 넣었다가 예상했던 대로 보기 좋게 낙방했다. 농사를 지어야 할까 재수생활을 해야 할까하는 기로에서 모내기나 담배농사에 비하면 공부가 훨씬 더 쉬울 것 같아 다시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새벽 기차를 타고 무작정 상경했다. 집단 수용시설 같았던 사설 독서실에 짐을 풀고, 학원 아르바이트로 학원비를 충당했다. 8개월간의 재수생활로 학력고사 성적을 70점 이상 올렸고 연세대학교에 합격했다.
대학을 졸업하면 좋은 직장에 취직하여 가난을 극복하고 출세할 것이라는 막연한 주변의 기대와는 달리, 대학생활은 평탄치 않았다. 없는 살림에 5남매를 키우느라 제대로 먹지도 못했고, 제대로 입지도 못했던 부모님들의 고생을 생각하면 한시도 공부를 소홀이 해서는 안 되지만 공부에 몰두할 수가 없었다. 대학 2학년 때 아버님이 중풍으로 쓰러지셨고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그 동안도 빚을 내어 생활비를 부쳐 주셨는데 그마져도 끊겨 버렸고, 빚쟁이들의 빚 독촉은 더 커져갔다. 돈을 빌리기 위해 이웃들 앞에 무릎까지 꿇었었다는 어머님의 얘기를 들으면 지금도 눈물이 나다.
월 3-4만원하는 달동네 월세 방도 구할 수 없는 사정이어서 고시원 총무를 하면서 지냈고, 과외지도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어서 써야할 정도로 어려웠지만 그 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없는 그 당시 대학가의 분위기였다. 군부독재 타도를 외치고, 농민 노동자 해방을 부르짖는 80년대 초반의 대학가는 말 그대로 난장판이었다. 6.29선언으로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앞당기는데 한 몫을 했다고 자부하지만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시기인 대학생활을 온통 화염병과 최루가스 속에서 보낸 것이 안타깝기만 했다.
1989년 대학을 졸업했고, 학생운동의 전력으로 취업이 막연해 학원가에 뛰어 들어 영어강사 생활을 7년 했다. 근무하던 학원에 전 재산과 여기 저기 친지로부터 끌어들인 3억 원의 돈을 투자했다가 IMF직전에 학원이 부도가 나는 바람에 한 순간에 직장을 잃고, 빚더미에 앉게 되었던 아픈 기억이 있다. 처와 아이들을 두고 빚쟁이들을 피해 노숙자 생활을 하면서 도망을 다녀야 했던 3-4개월의 시간은 정말 악몽이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옛말이 딱 맞다. 어린 시절부터 가난에 너무나도 익숙해 있었고, 고시원이나 자취방 생활로 단련된 터라 사막 한가운데 버려져도 언젠가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자살 밖에는 해결책이 없을 것 같았던 암흑 같은 절망감 속에서도 한 줄기 희망의 빛이 있었다. 여기 저기 빚쟁이들의 독촉 속에 마지막 남은 재산인 아이들 교육보험 450만원이 재기의 씨앗이 되었다. 1997년 말에 그 돈을 보증금으로 강의실 세 칸을 빌리고, 수강생 7명으로 구멍가게 같은 작은 학원을 열었다. 청소, 상담, 강의, 스쿨버스 운행에 이르기까지 학원사업에 필요한 모든 것을 직접 했다.
죽기를 각오하고 시작한 일이기에 누적된 피로를 이기지 못해 코피가 터져도 즐거웠고, 빙판길에 운행하던 봉고차가 뒤집어져도 툭툭 털고 일어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수업에 열중했다. 초기 6-7년은 조상님 제사 올리는 시간 외에는 쉬어보지 않았다. 매일 새벽1시 이전에는 퇴근해 본적이 없지만 아침에는 늘 눈뜨기가 무섭게 출근이 기다려졌다. 조금 성장했다고 절대 자만하지 않았다. 학원의 성장을 남들은 기적이라고도 했고, 벌 만큼 벌었으니 이젠 쉴 때도 되지 않았냐고도 했지만, 수강생이 500명을 넘을 때나 5,000명을 넘을 때나 생활은 늘 똑 같았다.
학원 사업을 시작한 지 12년 만에 지역 1위 자리를 차지했다. 고양시 전역에 8개의 건물에 6,000여명의 학생들이 수강하는 명문 입시학원으로 우뚝 섰다. 먹고 사는 것만을 목표로 했던 초기와는 달리 학생들을 대하면서 점차 인재 양성이라는 교육자적인 사명감도 생겼고, 대한민국 최고의 교육 기업으로 우뚝 서겠다는 목표가 있었기에 멈출 수가 없었다.
좁은 국토, 빈약한 천연자원, 강대국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위치 등의 악조건 속에 놓여 있는 대한민국이 세계화의 무대 위에서 당당히 맞설 수 있는 무기는 바로 교육이다. 자녀의 교육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이라도 감내하려는 학부모들의 높은 교육열이 있기에 다행이다.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오늘날 세계 10위권의 선진국으로 발돋움 한 것도 바로 우리민족의 교육열 덕분이다.
학원 사업은 이젠 나의 손을 떠났다. 보다 더 전문적인 지식과 탁월한 경영능력을 겸비한 경영자에게 맡겨 지역 학원이 아니라 전국적인 규모의 교육기업으로 성장하는 것을 목표로 상장 준비를 하고 있다. 장차는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교육전문 기업으로 크게 성장할 것으로 믿는다.
끝으로 향후 계획을 물어 보았다.
“학원운영은 전문 경영인에게 맡기고, 고향 예천에 내려와서 살 계획이다. 돈을 더 벌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고향의 품에서 맑은 공기, 깨끗한 물을 가까이 하고 이웃과 푸근한 정을 나누는 삶을 살고 싶다. 그 동안 사업을 하면서 쌓은 노하우를 살려 축산업이나 무공해 농작물 유통사업을 구상하고 있다. 이젠 재래식 농법으로는 희망이 없다. 창의적인 고부가가치 농축산 아이템을 개발하고 유통과 마케팅 전략이 함께해야 한다. 즉, 농사가 아니라 농업경영의 차원으로 접근해야 한다.”
김학동 이사장은 장시간 인터뷰하면서도 자신의 성과에 대해서 자랑스러워하지만, 과거보다는 현재와 미래를 계속 이야기 했다. 매우 겸손하며, 상대방을 배려하고,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우리는 모습에 인간적인 매력을 느꼈다. 꾸준히 자기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위기를 철저하게 기회로 만들 줄 아는 지혜와 성찰을 겸비한 전문 경영인이었다.
김학동 이사장은 이런 사람
-보문면 오암리 출신(62년생). 보문초등(37회). 대창중(28회). 대창고(26회)
연세대독문학과 졸업, 고려대 교육대학원 평생교육자 과정, 글로벌 리더 과정 수료.
-97년 일산 푸른학원 설립. 일산 마두동 본원 등 8개 캠퍼스를 운영해온 C대
-고양시 학원연합회장, 경기도 학원연합회 부회장 역임
-서울경기지역 5개 학원과 통합하여 지주회사“타임교육홀딩스‘를 설립하여 상장 준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