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오랜 전통과 선비정신이 아직도 일상의 근간을 이루고 있고 향토문화가 살아있는 효(孝?)의 고장 경북 예천에서 칠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마을은 소백산맥의 지맥이 북쪽으로 높게 펼쳐져 있어 산새가 아버지 품 같고 남쪽으로 낙동강과 내성천유역을 형성하여 풍요와 안녕이 기대되는 분지형태의 고장이다.
이곳에서 청정하고 아름다운 농경생활만큼이나 순박하고 뿌리고 가꾸는 대로 거두어지는 작은 철학을 배우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당시 어른들의 말이 곧 법이고 따라야 할 규칙이었던 그의 집안의 가풍은 정직(正直)이었다.
그래서 거짓말을 하면 절대 용서가 안 되는 엄격한 가정교육 속에서 그는 집안의 맏이로 대들보라는 무거운 책임이 지워진 채 성장했다.
그 당시 농경사회가 경제 일반을 차지하였듯이 누구나 농사일을 하며 살았던 때라 부모님이 일하러 나가시면 그는 늘 동생들을 보살피고 돌봐야 했다.
자신도 어린데 더 어린 동생 여섯 명을 데리고 있으면서 싸우면 말려야 하고, 먹을 것이 있으면 나누어줘야 하며 울면 달래주어야 하는 맏형으로서의 큰 책임을 지는 부지런한 어린 시절이었다.
저녁때가 되면 부모님이 오시기 전에 밥까지 지어야 하는 일인삼역을 하며 지냈던 그는 학업성적까지 우수한 모범 어린이였다.
그렇게 언제나 든든한 맏형으로서 책임을 다하며 동생들에게 본을 보였다. 그는 그때에 나눔의 원칙과 내리사랑이 몸에 배였는지 어른이 되어서도 언제나 자신이 어느 사회위치에 있던지 맏형으로서의 의식을 져버린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가난한 형편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더 이상의 학업은 진행할 수 없었다. 너무도 학교에 가고 싶었고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그러나 동생들과 집안 형편을 위해서 진학을 접고 농사일을 도우며 독학을 했다.실로 주경야독하는 자신의 의지와 싸우는 생활이었다.
그의 끈기와 의지는 집안의 외가 쪽 아저씨가 운영하는 책방의 책을 모조리 독파하는데 기여했다. 무슨 책이든 책이 좋아서 읽고, 독서하는 것이 좋아서 읽고, 남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서 읽다보니 그렇게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갈급했던 지적욕구(知的慾求)를 충분하게 채울 수 있어 독서삼매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때때로 시나 수필 등 글도 쓰면서 멋진 글귀를 남기기도 하고 마음에 꿈을 심기도 했다.그렇게 자신을 다듬어가며 독서를 통해 섭렵한 다양한 지식은 훗날에 두고두고 자신의 일상에 진주알 보석처럼 깨우침과 큰 교훈으로 가르침을 주는 교과서가 되었다고 한다.
그때가 참으로 아름다운 시절이었음을 이제와 돌아보면 아련하게 느낀단다.그중에도 또렷하게 솟아오르는 글귀는 ‘비켜라 운명아 내가 간다!’라고 한다. 그는‘인생은 내가 삽질하고 호미질 하는 대로 개척 되고 그렇게 만들어진다!’라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신념대로 운명을 재단하고 계획하는 자신의 삶의 주인공이 되어 성년을 맞이했다. 그가 서울에 올라와 처음 시작한 일은 군대 가기 전 친척집의 벽돌공장에서 심부름을 하는 일이었다.
잠시 머무는 일이었지만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경제활동을 체험하고 노동자들의 일상을 느끼는 시작이 되었다.
모든 것이 이론과는 다른 실상이지만 자신의 체험 속에서 보호받아야 할 권리도 느끼고 자신의 존재의미에 소명이 느껴질 때쯤 나라를 지키는 일에 부름을 받았다.
군복무를 마친 후에 새롭게 <범양냉방>회사에 취업을 했다. 그리고 점차 사회도 알고 동료와 이웃을 돌아보는 따뜻하고 정의로운 시민의 한사람으로, 노동자로 거듭나고 있었다.
그는 열심히 일을 해도 일한 만큼의 노동력이 제대로 인정되지 못하는 사회적 불합리성과 열악한 근로조건에 관심을 가졌다. 자신보다 동료들의 모습을 통해서 더욱 투명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그는 노동자들의 땀의 가치가 제대로 인정되기를 소망했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대접을 받으며 일하는 만큼 잘살기를 희망했다. 그래서 취업 3년이 지나면서 노동자들의 권익을 대변하고 그들의 근로조건개선을 통하여 취약한 작업환경을 바꾸고 싶어 회사에서 쫓겨날 각오와 함께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많은 근로자들이 함께 뜻을 같이 해주었고 큰 힘이 되었다. 스스로 요구만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와의 적절한 관계유지와 협조로 서로 협력하는 노사관계, 즐거운 일터를 위해 많은 날을 고뇌하며 노력하는 조합운영을 했다.
그의 노동자를 위한 노력은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지역 노동자를 대표하는 의장으로서의 역할이 주어졌다.
그는 더욱 다양하게 그들의 권익과 행복지수를 높이기 위한 운동을 전개해나갔다. 특히 노동자들이 서로 정보를 교류하고 그들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노총문화센터를 만든 것은 그의 큰 보람이라고 한다.
그가 노동운동을 함에 있어 항상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노동자들의 대표로 그들의 권익을 위해 관공서나 중앙정부에 건의하는 일도 허다했으나 뜻이 관철되지 않고 접힐 때가 더 많았다.
그래서 그는 그들을 위해 건의하는 위치가 아니고 수용하는 위치가 된다면 경험자로서 올바른 집행과 행정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 노동운동의 방향을 시민사회로 확대시켜 모든 이들의 행복을 위해 일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더 큰 일을 위해 군포시 민선시장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시장이 되어 거리로 나갔을 때 자신의 손을 잡고 눈물을 훔치며 반기던 많은 사람들 때문에 콧등이 시큰하던 기억은 지금도 가슴이 찡하다고 한다.
그는 무엇보다 군포시민의 맏형으로서 지난날 자신처럼 생활이 어려워 배울 기회를 놓치는 어려운 청소년들과 소외계층 등 힘없는 곳에 반드시 힘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이 겪었던 경험과 지혜를 통해 오직 정직하고 옳은 것이 무엇인가와 공익우선주의를 기준으로 삼아 집행자로서의 소임을 다하려고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그는 “개인의 이익보다 공익에 원칙을 두고 다른 사람이다 잘 살면 나도 더불어 잘 산다. 일하는 것이 참 재미있었다.작은 도움으로 시민이 잘 산다고 생각하면 즐거웠다.
군포라는 큰 그림을 그리고 하나씩 채워갈 때마다 더 멋진 그림이 채워졌다.완성을 못했던 그림이 있어 아쉽기는 했지만...” 그는 아직도 곳곳에 자신의 임기에 채워졌던 그림을 보며 살아온 인생에 오케이 동그라미를 한다.
그는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죽을 각오로 오직 의(義)로운 일에 충실했던 이순신 장군과 정직과 성실을 몸소 실천으로 보여준 자신의 어머니를 가장 존경한다고 한다.
그분들을 닮고 싶어 지금껏 열심히 살다보니 후회 없는 삶이 되었다는 그는 겸손한 마음으로 후배들에게 이른다.
“어른을 공경하고 지속적으로 꿈을 가져라. 꿈은 이루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조급하게 굴지 말고 노력하며 기다려야 한다.
특히 나 개인을 위해서보다 공익이 되는 꿈을 갖고 키워 가면 좋겠다.다른 사람이 행복해야 내가 행복하고,내가 남을 믿어야 남도 나를 믿는 신뢰 있는 사회 건강한 사회가 된다.
나도 많은 사람들이 나를 믿고 따라주어 고맙고 그분들에게 실망시키지 않고 보답하고자 더욱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가 이르는 대로 나보다 남이 행복해지기를 바라고 매사에 공익우선에 원칙을 둔다면 나도 더불어 잘살고 행복한 아름다운 시민사회가 될 것이다.
* 김윤주는 어떤사람 *
경북 예천군 용문면 출생
범양냉방 노동조합 위원장
한국노총 경기중부지역지부 의장
안양군포의왕 환경운동연합 지도위원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중앙위원
경기도 노총장학재단이사
군포시장(민선 2, 3기)
가족행복위원회 경기도총괄본부장
대통합민주신당 창당준비위원
제 18대 국회의원선거 비례대표후보(통합민주당 26번)
(사)동북아평화연대 자문위원
(사)청소년운동연합 군포지회장
대통령포상
석탑산업훈장
한국지방자치경영대상 최고경영자상
2010년1월 재경예천군민회 자랑스런출향인상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