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군 예천박물관은 울릉도·독도 영유권을 입증하는 대표 소장품인 동국통지를 보물로 신청한다고 밝혔다.
그동안 일본 학계는 “조선 정부의 공도정책(空島政策) 결과 조선 사회는 울릉도 및 독도를 망각했으며 17세기 안용복과 일본의 충돌, 19세기 일본의 한반도 침략으로 인해 비로소 조선인들이 울릉도·독도를 재발견했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그 주장과 다르게 예천 지역 유학자가 1868년 편찬한 백과사전류의「동국통지(東國通志)」에는 조선 숙종 때 인물인 안용복이 울릉도·독도 영토문제를 해결한 사건 전말이 기록되어 있다.
이에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선임연구원 홍문기 박사(독도사료연구위원)는 “조선시대 울릉도에 관한 지식이 지성계에서 유통·활용된 사례로 조선 사회가 울릉도·독도를 망각했다는 일본 학계의 주장을 강력하게 반박하는 자료”라고 평가했다.
특히, 「동국통지」 ‘지리지’에 수록된 울릉도ㆍ독도 관련 기록은 일본의 독도 역사 왜곡을 정면 대응하는 새로운 자료를 발견한 것으로 19C 예천 지역에 거주하는 선비들조차 이미 울릉도ㆍ독도를 우리나라 고유 영토로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더불어「동국통지」는 예천을 대표하는 학자인 산천 박주종 선생이 1868년 편찬한 우리나라 문물 백과사전으로 단군에서부터 조선 순조 대까지 천문ㆍ법률ㆍ지리ㆍ제사ㆍ예악ㆍ병법ㆍ형법ㆍ문화ㆍ관제 등 기원과 변천 과정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으며 중국 중심 역사관을 벗어나 자주적인 시각으로 우리나라 역사 전반을 기술하고 있다.
예천박물관 관계자는 “소장된 유물이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도록 귀중본을 지속적으로 선별·연구하고 그들이 남긴 유물을 통해 예천 지역 역사인물을 재조명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지난해 2월 22일 개관한 예천박물관은 지금까지 30여 기관·개인·문중으로부터 2만 여 점 유물을 확보해 공립박물관 중 가장 많은 268점의 보물을 소장한 박물관으로 잘 알려져 있다.
특히 지금까지 금곡서당창립문 등 8건 14점을 도지정문화재로 지정했으며 사시찬요 등 3건 3점을 보물 지정 심의 중에 있고 지난해 10월에도 보물 3건 3점, 보물 승격 2건 3점, 도지정문화재 2건 16점 소장 유물을 추가 신청하는 등 지역 문화 발전을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東國通志』「地理志」 鬱陵于山
蔚珍東海中鬱陵于山, 有果竹檀香蠙珠鰒鮯之利. 初其國愚而恃險, 新羅何瑟軍主異斯夫爲木獅子, 怖而降之. 世空其地, 我太宗成宗, 皆刷出流民, 其後及三年一審. 肅宗二十一年, 倭人假稱礒竹島, 欲乘空爭占. 東萊櫓軍安龍福怒逐之, 追辨至伯耆州以還.[李瀷曰, “龍福自稱‘鬱陵搜捕將’, 與島主抗禮, 言事甚詳. 龍福以一卒之賤爲國家, 出萬死, 抗强敵, 折奸萌, 眞是英雄儔匹.”] 已而馬島主得本國書契慚謝, 遂止.
울진 동쪽 바다 가운데 울릉도와 우산도에는 과실나무, 대나무, 박달나무, 향나무, 진주조개, 전복, 대합 등의 이익이 있다. 처음 그 나라가 험한 것을 믿고(항복하지 않자) 신라 하슬라(何瑟羅) 군주(軍主) 이사부가 나무 사자를 만들어 공포스럽게 하여 항복시켰다. 대대로 그 땅을 비워두다가, 우리 태종과 성종이 유민들을 쇄출하였다. 그 후 3년이 되면 한 번씩 살피게 하였다. 숙종 21년 왜인들이 의죽도(礒竹島)라고 가칭하며 비워둔 틈을 타 차지하려고 하였다. 동래의 로군(櫓軍) 안용복이 성내어 그들을 쫒아내고, 뒤따라가서 변론하였는데, (일본) 백기주(伯耆州)에 이르렀다가 돌아왔다.[이익(李瀷)이 말하였다. “안용복은 ‘울릉수포장’(鬱陵搜捕將)이라 스스로 칭하고, 도주(島主)와 대등한 예(禮)로 상대하였으며, 일을 말하는 것이 매우 자세하였다. 안용복은 한명의 천한 졸병으로서 국가를 위해 만 번 죽음을 무릅쓰고, 강적에 대항하여 간사한 싹을 꺾었으니, 참으로 영웅에 짝한다고 하겠다.”] 얼마 후 대마도주가 본국의 서계(書契)를 가져와 부끄러워하며 사과하였다. 드디어 (사건이) 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