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舊韓末) 문경, 예천, 안동에서 살다간 지식인 송오(松塢) 이성락(李晟洛) 선생의 문집을 손자들이 번역해 최근 출간했다.
1863년(철종 계해년)에 진성이씨(眞城 李氏) 원도(元道)씨의 아들로 안동 임하에서 태어난 송오 선생은 현 문경문화원 향토사연구소 이욱(李旭) 소장의 할아버지다.
이 소장의 형 인환(仁煥) 선생과 종형 주섭(宙燮, 호를 下宇로 쓰며 이 책을 번역하고, 문경시민명륜학교에서 고전을 가르치다가 올 5월에 돌아가셨다.) 선생이 시와 문장을 번역했으며, 이 소장이 편집을 한 이 책은 필사(筆寫) 영인 220쪽, 번역 322쪽 등 550쪽에 이른다.
송오(松塢) 선생은 4남 1여를 두었으며, 첫째 아들 형걸(衡杰)이 예천에서 한의사로 일하며 6남1여를 두었으니, 그 중 둘째 창섭(昌燮) 선생이 구인사 불교역경원장으로 일하는 등 한학에 밝았다. 그 아들 이성 씨는 고려대를 나와 행정고시를 거쳐 현재 민선 구로구청장을 하고 있으니 송오(松塢) 선생의 증손자다.
송오(松塢) 선생은 27세인 1889년 과거(科擧) 예비시험인 대구향시에서 장원(壯元)을 차지하는 등 문장을 날렸다.
그러나 대과(大科)를 보기 위해 서울로 갔으나, 세도가(勢道家) 모(某)씨의 농간(弄奸)으로 과장(科場)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대신 할아버지를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로 교지(敎旨)를 주겠다는 약조를 받아 돌아와야 했다. 그동안에 송오(松塢) 선생의 부인 의성김씨가 돌아가시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이 당시 과거는 초시를 돈으로 매매했다. 처음엔 2백 냥에서 3백 냥을 주는 등 금액이 오르지 않았는데, 나중에는 5백 냥, 1천 냥이나 갔다.
이 무렵 과거 시험에 응시했던 윤치호, 이승만, 김구 등도 이와 같은 편법 때문에 모두 과거 시험에서 낙방했으며, 중견 관료의 아들이던 윤치호만 음서제도로 관직에 진출했고, 가난한 환경에 처해있던 이승만과 김구 등 여러 가난한 집안의 자제들은 이에 좌절하여 기독교와 동학에 투신하는 것이 당시의 실상이었다.
송오(松塢) 선생도 바로 이런 구한말에 살았으며, 망국(亡國)의 시기에는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 선생의 단식 순국에 즈음해 만사(輓詞)를 올려 조문(弔問)해 일경에 체포, 안동형무소에서 투옥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더 이상 고향 안동에서 살 수 없기에 이르러 강원도 횡성으로 출향, 이후 문경 갈평, 예천 호명으로 이거하다가 예천읍내 노상리 소나무 언덕 즉 송오(松塢)에 살다가 타계했다.
이 문집에는 송오 선생이 겪고, 본 문경, 예천, 안동, 대구, 횡성 등을 노래한 시와 문장이 눈길을 끈다. 그중 예천에서 점촌에 들러 이욱 소장 집에서 자고, 기차를 타고 대구, 경주 포항을 여행한 ‘남유록(南遊錄)’은 1934년 이곳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함창, 상주, 옥산 터널, 아천, 김천, 대신, 아포, 구미, 왜관, 신동, 지천, 대구역 풍경이 생생하며, 대구에서는 도회지가 하도 번화해 ‘形形色色奇奇怪怪’하다고 표현하고 있다. 송오 선생은 달성공원도 관람했으며, ‘5층집엘 갔는데, 각 층마다 가운데를 통하는 큰길이 있고, 좌우 시렁에 칸을 만들어 온갖 물건을 쌓아서 마치 신선세계의 신묘한 집 같다’고 썼다.
또 ‘한 곳에 서 있으니 나도 모르게 자연스레 아래로 떨어져서 제일 아래층으로 돌아왔다.’고 해 대구의 백화점에서 엘리베이터를 탄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 우스꽝스럽다.